(사진1)2006년 11월에 촬영한 완쯔 구(Wan Chai/灣仔區)

현재의 홍콩은 뭔가 평행선에 서 있는 듯 보인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중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갈수록 사람들의 불만족이 심해져 가는 듯 보인다. 홍콩 병합에 따른 체제 변화에 따른 불안은 1980년대부터 계속된 일이다. 83년에 환율 폭락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97년 홍콩 병합 직전 이민율(emigration rate/정확히는 홍콩 이탈율?)이 폭증하기도 했다. 대중매체에서도 병합에 따른 불안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홍콩 국민들의 진짜 생각일까? 다른 포스팅에서도 봤겠지만, 올해 초 모 설문조사에 따르면 홍콩인의 90%가 과거 영국이 통치하던 시절이 현재보다 낫다고 응답했고, 2008년에는 전체 보통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의 홍콩은 말이 민주화지, 완전하게 민주화된 곳은 아니다. 행정장관 선출을 시민들이 직접 할 수 없고, 선거인단 역시 중국 중앙정부의 손아귀에 놓여 있으며, 지방의회 의원 역시 선거법 규정으로 인해 친중국 계열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만일 앞에서 언급한 설문조사가 실제 홍콩인들의 생각이라면, 이는 대형 충돌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현재 중국 중앙정부의 정책은 "하나의 중국"이다. 일국양제라는 개념이 대만을 의식했지, 홍콩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이다. 비록 97년에 50년간 기존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홍콩도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중국에 흡수되어야 하는 곳이다. 만일 홍콩 시민들이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라면, 중앙정부는 상당히 난처해질 것이다.

정치적으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중국의 경제시스템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그 기저에는 공산당식의 계획 경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홍콩의 경제시스템은 경제상황이 좋을 시에는 정부가 거의 개입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이다. 세율 등 각종 규정 역시 자본 투자에 유리하게끔 맞춰져 있다. 그러나, 만일 홍콩이 중국화된다면 과거에 누렸던 영광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국의 경제특구 역시 홍콩과 비슷한 파격적 정책을 통해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과연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기간이 끝나면, 홍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중국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크나큰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국식이 아닌 영국식으로 되어 있고, 민주화를 외치며,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한다. 이는 중국 중앙정부의 경제 및 정치 시스템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기존 체제 내에서 이 갈등을 부분적으로나마 봉합할 수 있는 방법은 경제특구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봉합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고 홍콩인들을 중국인으로 끌어안으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1967년 폭동 때처럼 인민군을 동원해 홍콩을 점령해 버리자는 식의 발상이나 결국 홍콩은 자치를 종료하고 중국령이 된다는 것이나 어떻게 보면 똑같은 사고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홍콩은 아마도 중국화된다는 불안 속에서 겉으로는 성장을 지속하지만, 자치 이후의 시대를 걱정하는 기류는 여전한 것 같다. 중국 본토와 홍콩은 많은 면에서 서로 상반된다. 계획경제가 가미된 자본주의 대 긍정적 자유방임주의의 구도라던지, 민주주의 대 사회주의의 구도만 보더라도 얼마나 홍콩인을 끌어안는 게 어려운 문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경제적 갈등을 모두 해결하지 않는 한, 자치 시대 이후의 홍콩은 또다시 1967년 폭동 때와 비슷한 격동기를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양측은 모두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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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아무리 영국의 식민지였다고는 하지만, 그 발전상에는 언제나 중국이 함께했다. 문화적인 것을 제외하고도 그러했다. 홍콩은 옛날부터 전란을 피하려는 남방 중국인들의 피난처였다. 태평 천국 운동, 제 1차 세계 대전, 국공 내전 때 전쟁을 피해 내려온 중국인 이민자들이 꽤 있었다. 홍콩이 1950년대의 중개 무역항으로써의 지위가 흔들렸을 때 홍콩을 되살린 것은 중국 본토에서 내려온 기술 인력이었다. 이들이 있어 홍콩은 1950~60년대까지 경공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었다. 홍콩이 중개 무역항으로써의 지위를 회복한 것 역시 중국 때문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공업 분야가 쇠퇴하기는 했지만, 중국 본토로의 교역 재개는 홍콩을 이전의 중개 무역항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에도 홍콩 특별행정구는 중국 당국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면서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림1)1967년 홍콩 폭동 당시의 사진.

한편, 중국 본토가 정치적으로도 홍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반환 전에도 크게 영향력을 미친 적이 있다. 바로 1967년 홍콩 폭동이다. 1966년에 중국 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본토가 혼란에 휩싸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마카오에서 대폭동이 일어났으며, 사실상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1967년 5월, 홍콩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발단은 한 공장의 파업에서 시작했으나, 판이 점점 커져서 대중교통이 마비되고, 급기야 6월 8일에는 선전의 시민군이 국경 마을을 공격하면서 급기야 홍콩 식민정부는 비상사태까지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각종 좌파 시설들이 폐쇄되었다. 좌파들은 폭탄과 무기까지 들고 시위 진압을 시도하려던 경찰과 영국군에게 저항하였고, 시위대의 폭력을 비판하던 인사들이 암살당하거나 중상을 입는 등 사태가 심각해졌다. 10월이 되어서야 폭력 사태가 진정되었다. 또한, 당시 인민해방군 광저우 지대장이었던 황용셩(黃永)이 홍콩 점령을 건의했다가 저우언라이(周恩来)한테 거부당했다고 한다.

또한,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다는 사실 그 자체도 홍콩을 한동안 들었다 놨다 했다. 1982년부터 홍콩 반환까지, 홍콩은 정치적인 압력에 시달렸다. 1983년 9월에는 누적된 경제적 불안정성이 폭발하면서 홍콩달러의 가치가 급락, 급기야 정부가 같은 해 10월에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영화 영웅본색에서는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하지만 오래 못 가니... 아까워..."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로 당시 홍콩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97년 반환 직전에는, 홍콩의 이민(emigrant)율이 치솟았다. 역시 이후의 불안에 대해 걱정한 사람들이 홍콩을 떠나간 것이다.

(그림2)2008년 홍콩 민주화 시위 사진

홍콩 반환 이후에는, 중국 본토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행정장관은 중국 정부의 임명을 받아야 하고 행정장관 선거인단 역시 중국 추천 인사로 채워져 있다. 또한, 홍콩 내 의회에서의 반중앙파(민주주의파)들은 선거법에 의해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생각하는 흐름과는 별개로,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008년에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있었으며, 전체적인 사람들의 생각 역시 점점 중앙정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사안이지만, 올해 실시한 모 설문조사에 따르면, 홍콩인들의 90%가 현재의 상황보다 영국 식민지 시절이 더 낫다고 답했을 정도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_(1800s%E2%80%931930s)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Modern_Hong_Kong_under_British_rule_.281950s_.E2.80.93_1997.29

http://en.wikipedia.org/wiki/Hong_Kong_1967_r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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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선전 시 지도(옛날 버전/현재 바오안 구 동쪽과 룽강구 동남쪽이 새로운 행정구로 분리되었다.)

선전 시는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특별행정구 바로 위에 있는 도시로, 남쪽의 4개 구(난산구, 푸텐구, 뤄후구, 옌텐구)는 덩샤오핑이 지정한 중국 최초의 경제 특구이다. 이 경제 특구의 성공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가속화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현재의 선전은 중국 전자 공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선전 시는 홍콩의 위성 도시라고 볼 수도 있다. 매일 3만여 명의 선전 시민이 홍콩으로 출퇴근하거나 등교하며, 두 지역 간 출입 제한도 점차 완화되고 있다. 또한, 홍콩에서 선전으로 들어가는 국경선 버스 노선만 6개에 이르며(B1,B2,B2P,B3,B3A,B3X), 홍콩 지하철 동철선의 Lo Wu(羅湖)역과 Lok Ma Chau(落馬洲)역은 각각 선전 지하철의 Luohu(罗湖)역, Futian Checkpoint(福田口岸)역과 국경을 맞대고 연결되어 있다. 홍콩에 비해 싼 물가 덕에 일부 홍콩인들이 선전으로 쇼핑하러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림2) 선전 시에서 운영하는 전철 회사들의 마크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홍콩의 영향이다.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홍콩의 후광을 입고 발전한 선전은 여러 면에서 홍콩의 영향을 받았다. 첫 영향은 지하철 시스템이다. 위에서 볼 수 있다시피 마크가 선 하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2008년에는 노선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기존의 1호선, 2호선 하는 식이 아닌, 홍콩 MTR과 비슷하게 노선 고유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또다른 영향은 홍콩과의 합병 움직임이다. 2007년 10월 10일, 당시 홍콩 행정장관인 도널드 창(曾蔭權)은 2020년까지 선전과 합병할 것이라고 밝혔고, 같은 해 12월에는 선전 시장이 홍콩을 방문하여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와의 합병 동의서에 서명했다. 만일 2020년에 두 도시가 실제로 합병할 경우, 뉴욕과 도쿄에 이어 소득규모 3위의 도시권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참고한 사이트)

http://ko.wikipedia.org/wiki/%EC%8B%AC%EC%B2%9C

http://en.wikipedia.org/wiki/Shenzhen_Metro

http://en.wikipedia.org/wiki/Shenz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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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007년의 홍콩 - 센트럴 지역의 뒷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사람들은 홍콩 하면 위의 그림 같은 다량의 마천루가 형형색색 빛을 내는 도시적 야경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이 홍콩의 전부는 아니다. 홍콩 역시 부산과 비슷한 도농 복합시이자 자치령이며, 중심 산업이 3차 산업(서비스업)이라고는 하지만, 1차 산업(농수산업)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림2)홍콩 섬 남서부의 뒷산에서 바라본 Lamma Island.

섬 전에 보이는 도시지역은 Pok Fu Lam(薄扶林) 도시지역이다.

Lamma Island(南丫島)는 홍콩의 대표적인 외곽 지역 중 하나로, 배우 주윤발(周潤發)이 자라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섬은 홍콩인들의 대표적 휴식처 중 한 곳이다. 이 곳에는 자동차가 없고, 건물 높이 제한이 엄격해 3층 이상은 지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섬의 문화는 홍콩 도시 지역과는 달리 느릿느릿 흘러가는 문화로, 이로 인해 대표적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이 문화에 대한 동경이 심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그림3)홍콩 북부의 국경지대 Ta Kwu Ling 지역

한편, 홍콩의 최북부 지역은 중국의 심천 시와 맞닿아 있는 국경지대로, 일반인은 허가 없이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그 덕분에 자연 환경의 보존은 매우 잘 돼 있는 편이다. 하지만, 사진과 같은 절경은 대부분 출입통제 구역에서나 볼 수 있다. 일종의 심천과 홍콩 도심 간의 그린벨트라고 볼 수도 있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Lamma_Island

:

(그림1)홍콩의 주권 양도 모식도

진나라가 홍콩에 진출한 이래 홍콩은 중국 대륙 왕조의 땅이었으나, 1842년 아편 전쟁에서 패하고 맺은 난징 조약은 홍콩 섬(위 그림의 진한 파란색)을 영국의 식민지로 둔다는 조항을 두었다. 이후 1860년에 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영국은 베이징 조약을 통해 주룽 반도를 홍콩 식민지에 추가하였다.(위 그림의 진한 보라색)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이후, 이전부터 이루어져 온 중개 무역항의 지위는 더 높아졌고, 영국인에 의한 개발이 시작되었다. 또한, 1898년, 영국은 신계 지역을 99년간 조차하기로 청과 합의했다.(위 그림의 연한 보라색)

File:Hktram1930s.jpg

(그림2)1930년대 홍콩 섬의 트램

땅만 넓힌 게 아니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홍콩에는 각종 영국 제도가 도입되었고, 서양 종교의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홍콩 달러화가 발행되는 등 전체적인 서양화 및 영국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또한, 인구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41년에는 약 7450명이던 홍콩의 인구는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급성장하여, 1941년에는 약 160만 명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역시 줄줄이 문을 열었다. 1888년에 센트럴과 빅토리아 피크를 잇는 피크 트램(Peak Tram/山頂纜車)이 개통하였고, 1904년, 홍콩 섬 북부에 트램이 개통하였으며, 1933년에는 대형 버스 회사 두 곳이 인가를 받는 등, 대중교통 역시 착착 구비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흐름은 1941년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군이 홍콩에 진주하면서 제대로 꺾이고 말았다. 1941년 12월 25일, 일본군이 홍콩에 진주하면서, 일본군은 다른 점령지들과 마찬가지로 전시 경제 체제를 홍콩에 적용하였다. 홍콩달러의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 군용 엔이 공용화폐가 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는 일반 시민들의 식량 및 위생 사정 악화를 불러왔으며, 이로 인한 결과는 극심한 인구 감소였다. 1941년에 약 160만 명이던 홍콩의 인구는 1945년 영국이 홍콩을 수복한 직후에는 60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림3)1960년대의 홍콩

그러나, 홍콩은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많은 수의 본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넘어갔다. 특히, 상하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또, 1950년대에는 중국으로의 교역길이 막히면서 중계무역항으로써의 홍콩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됐다. 그러자, 중국에서 넘어온 인력들을 바탕으로 홍콩은 1950년대에 경공업이 싹트게 된다. 1960년대에는 직물 산업이 성장하면서 홍콩 경제가 한껏 더 발전하였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의 여파로 1967년에 홍콩에서 좌파들이 주도한 대폭동이 일어나 홍콩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한, 1970년대 문혁의 종료 이후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과 중국에 비해 높아진 임금으로 인해 홍콩의 공업은 쇠퇴하고 말았다. 또한, 중계 무역항으로의 입지 또한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림4)2007년의 홍콩

1980년대 들어서는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베이징을 방문하였고, 이로 인해 홍콩 내 경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어,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환율이 요동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7년 반환까지, 중국으로의 급격한 흡수를 우려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반환 이후에는 98년도 아시아권 경제위기(한국의 IMF위기 포함)의 폭풍을 맞았고, 2001년 미국 경제 위기 및 9·11 테러, 2003년 SARS 파동 등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현재는 중국 본토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과거의 위상을 넘어 중국과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홍콩인들 사이에서의 본토 정부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올해에 실시된 South China Morning Post(南华早报)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영국 지배 시절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을 정도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_(1800s%E2%80%931930s)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occupation_of_Hong_Kong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Modern_Hong_Kong_under_British_rule_.281950s_.E2.80.93_1997.29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


:

아무리 홍콩이 약 150여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문화의 뿌리는 중국이다. 홍콩은 진 왕조 때 처음 중국 대륙 문화권에 통합되었으며, 진 멸망 이후 월(越)의 지배를 받다가 한의 지배를 받은 이래 영국에 할양되기 전까지 계속 중국 대륙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특히, 홍콩은 당나라 때 광둥 성이 무역항으로 발전할 때 그 혜택을 같이 누렸으며, 현재의 툰먼(Tuen Mun/屯門) 지역은 해군 기지 및 소금 생산 기지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콩은 남송의 최후의 항쟁지였다. 1276년에 남송 왕조가 몽골에게 패주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곳이 란타우 섬의 북부 Mui Wo(梅窩) 지역이다.

중국과의 오랜 상호작용은 홍콩의 문화적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홍콩의 공용어는 영어와 중국어이며, 가장 잘 통하는 언어는 광둥어(Cantonese)이다. 현재 홍콩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중국어는 만다린어보다는 광둥어가 많으며, 홍콩 지명의 영문 표기 역시 광둥어 독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중국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혜음 현상에 따른 숫자의 구별이 홍콩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숫자 4를 꺼리거나, 숫자 8을 좋은 숫자로 여기는 건 대륙과 홍콩의 공통적인 현상이며, 광둥어계 혜음 현상에 의한 숫자 차별 역시 홍콩에 존재한다. 숫자 7과 9는 남성 성기를 뜻하는 단어와 혜음 관계에 있어, 이들 숫자를 조합할 경우 욕이 되 버리기도 한다.



(그림1)Wong Tai Sin(黃太仙) 지역의 밀집된 중국식 점집들

사람들의 사상적 기반도 압도적으로 중국적이다. 홍콩 사람들 중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70%가 불교 혹은 도교를 믿고,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유교적 혹은 도교적 사고방식이 깊게 박혀 있다. 또한, 홍콩 영화의 주요 소재는 무술로, 역시 영국보다는 중국의 영향이 훨씬 더 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Numbers_in_Chinese_culture

http://en.wikipedia.org/wiki/Religion_in_Hong_Kong

http://en.wikipedia.org/wiki/Cuisine_of_Hong_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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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의 진주 시절(1941~45)을 제외하고는 계속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그로 인해 보통 홍콩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에 기초하지만,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융합 문화로 정의되며, 현재도 그 융합적 특성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홍콩의 문화 중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여러 가지 문화적 특성이 영국의 영향을 받은 면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홍콩의 학제는 영국의 영향을 받은 시스템이다. 또한, 영국의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홍콩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는 공개적인 선교를 금지하는 중국 본토의 방침과는 차이가 있다. 앞의 것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영어다. 영국 통치 당시 공용어였던 영어가 지금도 홍콩의 공용어 중 하나이며, 차량 통행 체계 역시 영국의 좌측통행을 반환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림1)영국처럼 좌측으로 문이 있는 홍콩의 2층버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Culture_of_Hong_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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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일국양제의 원칙에 의거해 적어도 2046년까지는 이전의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며, 이는 경제 체제도 포함한다. 홍콩이 현재 운영 중인 경제 체제는 자유방임주의에 약간의 정부 개입이 들어가 있는 경제 체제이며,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경제 체제로 손꼽힌다. 그 개입도 주로 1997년 중국령이 된 이후에 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최저임금 제도, 국민연금과 비슷한 "Mandatory Provident Fund( 強制性公積金)", 등이 있다.


(그림1)Victoria Harbor, Hong Kong. 왼쪽이 홍콩 섬, 오른쪽이 주룽 반도이다.

홍콩의 가장 큰 경제적 역할 중 하나는 중개 무역항이다. 상하이와 비슷하게, 중국 상품과 타국 상품이 홍콩에서 거래되어 수출입된다. 또한, 1998년에 첵랍콕으로 이전한 홍콩 국제공항 역시 중개 무역 및 항공 환승장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편, 홍콩은 영국으로 넘어간 이래 중개 무역 말고도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1950년대에는 중국 본토로부터 들어온 대량의 기술 인력을 바탕으로 경공업이 싹을 틔웠으며, 1960년대에는 직물 공업이 발전하였으며, "MADE IN HONG KONG"이 고품질 상품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 중국 본토의 개혁·개방 정책과, 중국 본토에 비해 높은 임금으로 인해 공업 기능의 대부분이 중국 본토로 빠져나가면서 홍콩의 산업은 자연스레 산업의 중심이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고, 지금도 그 기능을 계속 유지해 나가고 있다.


(참고한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Hong_Kong

http://en.wikipedia.org/wiki/Economy_of_Hong_Kong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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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홍콩은 중국령이다. 그러나, 홍콩의 정치·경제 체제는 본토의 체제와 다르다. 이는 1984년에 덩샤오핑이 제안한 일국양제에 의거한다. 일국양제란 중국 본토의 정치 체제인 사회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공존하는 정치 제도인데, 이 법에 의거하여, 홍콩은 현재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자치를 누리고 있다. 이는 1990년에 제정된 홍콩 기본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The socialist system and policies shall not be practised in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and the previous capitalist system and way of life shall remain unchanged for 50 years."

(해석)사회주의 시스템과 정치 체제는 홍콩 특별 행정구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이전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생활방식은 50년 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림1)홍콩 정부청사

한편, 홍콩의 정치 체제는 식민 이전의 영국 체제를 대부분 따르고 있다. 3권 분립 역시 그대로 유지된다. 홍콩 정부는 현재 행정장관이 이끌고 있는데, 행정장관직은 800명의 선거인단이 선출하고, 중국 정부가 임명한다. 행정장관을 보조하는 "행정회의(行政會/Executive Council)"가 있으며 사실상의 행정부라고 보면 된다. 


(그림2)홍콩 입법 의회 의사당. 2011년 신축.

입법부 역시 중국 중앙과는 별개의 입법부가 존재한다. 홍콩 입법 의회(Legislative Council of Hong Kong)는 5개의 선거구에서 보통 선거로 선출된 70인의 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선거구는 각각 홍콩 섬(Hong Kong Island), 주룽 반도 서부(Kowloon West), 주룽 반도 동부(Kowloon East), 신계 서부(New Territories West), 신계 동부(New Territories East)이다. 주룽 반도 서부 선거구는 대부분 신주룽에 속해 있지 않았거나, 그 구역 바로 위쪽에 있는 3개의 구(Yau Tsim Mong, Sham Shui Po, Kowloon City)이며, 주룽 반도 동부 선거구는 신주룽 동부 지역 2개 구(Wong Tai Sin, Kwun Tong)이다. 신계 서부 선거구는 주룽 반도 버스권역 3~6권역(Tsuen Wan, Kwai Tsing, Tuen Mun, Yuen Long)에 속해 있는 구 및 란타우 섬과 그 도서 지역(Islands District)을 포함하며, 주룽 반도 동부 선거구는 버스권역 7~9권역(North, Tai Po, Sha Tin, Sai Kung)으로 되어 있다. 현재 홍콩의 중앙 의회 의원 70명 중 43명이 친중국파이며, 나머지는 확대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파이다. (27명) 하지만, 지방 의회로 가면 민주주의파 의원 비중이 더 적다. 지방 의원 507명 중 99명만이 민주주의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홍콩에서 점차 확대되어 가는 중국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보여 준다.


(그림3)홍콩의 행정구역 지도(영문)

(그림4)홍콩의 종심법원

한편, 홍콩의 사법부는 3심제를 유지하고 있다. 홍콩 사법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종심법원(Court of Final Appeal/香港終審法院), 고등법원의 역할을 하는 상소법원과 원소법원, 그리고 여러 가지로 역할이 분담된 지방법원 격의 법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아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정보사찰 프로그램 "프리즘"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홍콩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밝히면서, 타 지역으로 도피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도 있다.


(참고한 사이트 및 이미지 출처)

이미지 : 모두 영문 위키(링크 형식으로 가져옴)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ED%8A%B9%EB%B3%84%ED%96%89%EC%A0%95%EA%B5%AC

http://en.wikipedia.org/wiki/Hong_Kong_Basic_Law

http://en.wikipedia.org/wiki/Legislative_Council_of_Hong_Kong

http://en.wikipedia.org/wiki/Pro-democracy_camp

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3061300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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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주룽 반도 시내버스 구역분할도

위의 지도는 Kowloon Motor Bus라는 회사가 일반 시내버스 운행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주룽 반도 및 신계 지역의 지도이다. 아편 전쟁 때 할양된 "주룽 반도"는 0~2권역 중 남부 권역을 일컬으며(바로 아래에 지도 별첨), 신계(新界)는 보통은 3~9권역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위의 지도에는 누락된 란타우 섬 및 도서 지역도 포함된다.

(참고 : "신주룽"이라고 하여 0~2권역의 북부 및 동부 지역을 일컫던 용어가 있으나, 현재는 버스권역이 합쳐져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는 주룽 반도 지역에 속한다.)

여기서, 잠시 홍콩 할양 및 반환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짚어 보겠다. (하단의 그림5도 같이 참조하면 좋다.)

1. 홍콩 섬 할양 - 1842년 난징 조약에 의거함. 제 1차 아편 전쟁 이후 체결(아래 지도 참조)

2. 주룽 반도 할양 -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거함. 제 2차 아편 전쟁 이후 체결됨. (위 지도의 0~2권역)

3. 신계 조차 - 1898년에 영국이 99년간 조차. (위 지도의 3~9권역 및 신주룽)

(참고 : 현재의 "신계"는 일반적으로는 신주룽을 제외한 3~9권역을 일컫는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여전히 신주룽은 신계이다.)


(그림2)Boundary Street(界限街)을 표시한 그림. 자세한 설명은 (그림3)의 설명을 참조할 것.

(그림3)역시 Boundary Street(界限街)을 표시한 그림. 이 길 이북부터 뒤에 보이는 산악지대 및 Kowloon Bay 등의 동부 0~2권역 지역은 "신주룽"이라고 칭한다. 빨간 선이 있는 이유는 카이탁 공항으로 인한 간척지 때문.

(그림4)홍콩 공항리무진 권역분할도. 거의 홍콩 전체가 다 들어 있다.

  홍콩을 크게 두 개로 나누자면, 홍콩 섬과 주룽 반도(그림 1의 0~2권역)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신계(일반적)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세 개로 나누자면 홍콩 섬 하나, 주룽 반도(그림 1의 0~2권역) 하나, 신계 하나, 이렇게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4개로 나누자면, 위와 같이 공항리무진 권역분할로 나눌 수도 있다. 여기서 희한한 점은 일반적 신계인 시궁구(Sai Kung District/西贡区)가 일반적 "주룽 반도"와 묶여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궁구의 지리적 특징에 기인하는데, 시궁구의 남동부는 별다른 지형적 장애물 없이 "주룽 반도"로 연결되는 반면, 사텐구(Sha Tin District/沙田区)의 경계선은 대부분 산으로 되어 있고, 두 구 사이를 연결하는 터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상, 시궁구는 남부 신도시 개발도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고, 버스노선도 대부분 주룽 반도 쪽으로 가는 차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원본사진 : from 한국 위키, 영문 위키, 구글 지도 / 구역분할 정보 : 영어 위키백과 참조)



(그림5) 홍콩 식민 역사 지도(출처 : 영문 위키)


참고한 문서 List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EC%9D%98_%EC%97%AD%EC%82%AC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A3%BC%EB%A3%BD

http://en.wikipedia.org/wiki/New_Kowloon

http://en.wikipedia.org/wiki/Boundary_Street

http://en.wikipedia.org/wiki/Convention_for_the_Extension_of_Hong_Kong_Terr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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