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의 대운하 건설

 

수나라의 대운하는 문제와 양제, 양대에 걸쳐 지어졌다. 수 문제 때는 광통거가 개통되었고, 수 양제 때는 605년부터 610년까지의 기간에 통제거, 한구, 영제거, 강남하가 개통되었다. 특히 수 양제가 동부 4개 운하에 공을 들인 이유는 무시할 수 없는 강남의 경제력이었다. 강남의 경제력을 확보해야 계획 중인 고구려 원정을 신속하고 빠르게 단행할 수 있었고, 화북 지방과 강남 지방을 고속으로 연결하여 강남 지방의 경제 개발 성과를 북쪽으로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한때는 이 운하가 관용으로만 이용되었다. 수 양제가 강남을 순행할 때 대운하를 이용하였고, 고구려 원정 당시의 군수물자도 대운하를 통해 탁군으로 운송되었다. 그런데, 후일 이 운하가 민간에 개방된 이후 더 많은 이득이 있었다. 북쪽과 남쪽이 연결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장안이 계속 수도로 기능하게끔 역할을 해 준 것도 대운하였고, 카이펑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나중에 북송은 이곳을 수도로 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시간 내에 그렇게 긴 운하를 개통시키는 데에는 당연히 부역의 고통이 따랐다. 당시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은 무려 1 5천만 명에 이르며,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부역에 동원되는 등 백성들의 고통은 엄청났다. 이는 수 양제의 학정의 시작이었고, 이어서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면서 각계각층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과적으로 대운하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준 게 맞지만, 정작 수나라를 무너뜨린 요인으로도 작용해 버린 것이다.


 

그림출처 : http://home.olemiss.edu/~gg/hstrymap/lishidit.htm, 필요에 의해 수정을 가함.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66~67p.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C%9A%B4%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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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씨의 진()이 선비족에게 쫓겨서 회수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것이 동진의 시초이다. 그런데, 이 천도가 강남의 지위를 한껏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화북의 한족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오면서 당시에는 화북에 비해 비교적 개발이 덜 된 강남 지방에서의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늪을 논으로 바꾸는 여러 가지 방법이 고안되었고, 밀려들어온 한족이 기반이 되어 경제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강남 지역은 명실상부한 중국의 경제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이유나, 송나라나 명나라가 강남에 수도를 뒀던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수 양제는 대운하를 통해 경제의 중심지인 강남과 정치의 중심지인 화북을 이으려고 했던 것이고, 송나라는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로 이야기하기에는 짧다. 그러나, 돈의 대이동이라는 면으로 봤을 때는 넣어야 하는 사실이었다. 강남 지역이 중국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남조의 성립 이후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인구 대이동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 이동했던 한족들은 화북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족 문화, 한족 경제의 발달 양상은 여전히 화북에서 지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출처 : 위키백과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50p.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C%A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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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1. 개척

한 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반흉노 군사 동맹을 체결하려고 장건을 월지로 파견하였다. , 나중에는 이광리를 시켜 서쪽의 대원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서역에 대한 많은 정보가 한으로 흘러들어왔으며, 이 길을 따라 동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2. 발전, 그리고 의의, 논평

실크로드는 중국사에 있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실크로드(좁게 말하자면 사막길)는 중국의 선진 문물이 서양으로 나가는 통로였으며, 또한 서쪽 지역의 문화적 유산들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였다. 예를 하나 들자면, 위∙진∙남북조 시대 때 대승 불교가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 들어와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실크로드는 정복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흉노족의 유럽 침공이나 몽골 제국의 대원정은 모두 초원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바닷길은 주로 서양 세력들이 먼저 개척해서 사용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당 때부터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사적 의미 말고도 실크로드는 특수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한족 왕조가 실크로드를 영내에 두지 못했다. 반면, 중국에 진출한 이민족 왕조는 실크로드를 영역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영내에 두고 있던 왕조들이 문화적으로 더 융성했으며, 개방적인 성격을 지녔다.


[1세기 당시의 실크로드] - 개척 초기의 지도이다.

(그림 파일 출처 : 위키백과)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38~39p. 62~63p.

http://ko.wikipedia.org/wiki/%EC%8B%A4%ED%81%AC%EB%A1%9C%EB%9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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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체제

 

개혁∙개방 체제는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 이후 주석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펼쳤던 정책으로, 현재 중국의 기반이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주의자였다. 그는 인민 공사를 폐지하고, 생산 책임제를 시행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남부 해안 지역에 시범 도입한 경제 특구는 대성공을 거두어, 점차 기타 해안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일국양제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에 편향되지 않고, 중국의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어떤 것이든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편, 1989년 천안문 사건 때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개방 정책을 중단해 논란이 일기도 했었지만, 1992년에 남쪽 성들을 방문하면서 행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및 개방 정책을 재개했다.

[의의와 평론]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덩샤오핑의 개혁은 오늘날 중국의 기틀이 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또한,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일국양제 개념이 생겨남에 따라 자본주의 지역인 홍콩과 마카오를 끌어안을 수 있는 역량이 생겼으며, 그 개념에 의거해 홍콩과 마카오는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중국에 반환되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덩 샤오핑의 개방 정책이 꼭 좋은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덩의 개방 정책 이후, 중국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있다. 공업인력으로 온 농촌 출신 인민들의 극심한 가난, 연해 지역과 내륙 지역 간의 갈수록 심화되는 격차, 다원화 문제 등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2013년에 출범한 시진핑 체제는 과연 이를 어떻게 해소하려고 할까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10~211p.

http://ko.wikipedia.org/wiki/%EB%8D%A9%EC%83%A4%EC%98%A4%ED%9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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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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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은 1962년 마오쩌둥이 실각한 이후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수정주의자들이 마오쩌둥을 제치고 실권자로 떠오르자, 이를 차단하고 다시 실권을 잡기 위해 1966년부터 10년 간 벌인 운동이다. 수정주의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마오는 홍위병들을 동원했다. 당시 학교를 정지시킨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짧은 표어로 10~20대의 어린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만들었으며, 이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했다. 공안도, 인민해방군도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모든 낡은 것들을 파괴하였다. 이들은 반혁명 인사를 지목해 자아비판을 강요했고, 문화유산들을 파괴하고 다녔으며, 소수민족 문화까지 핍박하고 다녔다. 이를 목적으로 벌어진 수없이 많은 가혹행위들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덩 샤오핑의 아들 덩 푸팡은 홍위병들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4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기존의 방침을 뒤집고 1968년에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활동이 중단된 홍위병들은 하방(下放)되어 농촌으로 보내졌다.

한편, 사회적 혼란이 잠재워지자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된 린뱌오는 1971년에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이후 등장한 사인방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덩샤오핑이 정계로 복귀한 상태였는데, 사인방은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를 정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미디어를 장악하고 공자와 린챠오를 비판하는 운동인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전개했으나, 인민들의 호응 부재로 실패했다. 한편 1976 1월에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사인방은 덩 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 분위기 탄압 등 행동에 나섰고, 덩 샤오핑 자신도 당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같은 해 9월에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후계자로 지목된 화궈펑(华国锋) 4인방을 체포하면서 문화 대혁명은 끝나게 된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8~209p.

http://ko.wikipedia.org/wiki/%EB%AC%B8%ED%99%94%EB%8C%80%ED%98%8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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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

 

대약진 운동은 마오쩌둥이 1958년부터 추진한 2 5개년 계획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려 경제 성장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 계획은 중국 내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농업 면에서는 여러 중소 합작사들이 합병되어 하나의 큰 합작사가 되었는데, 이를 인민 공사(人民 公社)라고 한다. 또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땅을 더 깊게 갈고, 씨앗을 더 빽뺵하게 심었다. 한편, 철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농촌에 재래식 용광로가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또한, 식사도 공동 식당에서 해결하는 등 전체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이는 영화 인생(人生)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리한 증산을 요구한 계획의 결과는 참혹했다. 농업 부문에서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지나치게 참새를 다량으로 제거한, 이른바 제사해 운동( 除四害 运动)의 여파로 농업해충이 창궐해 1960년에는 메뚜기의 대습격이 일어나 전체 쌀 생산추정량의 반절 이상이 사라졌고, 거기에 자연 재해가 연이어 터지면서 중국에는 때아닌 대기근이 불어닥치게 된다. 이를 3년 대기근이라고 한다. 또한, 철 쪽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집에 있던 각종 철을 다시 녹여서 제품을 만들기는 했는데, 상당히 열악한 품질 때문에 쓸모가 없었다. 거기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에 지나치게 충성적인 간부들이 중앙에 생산량을 보고할 때 실제 생산량보다 더 많이 보고하고, 실제로 그런 줄 아는 당은 더 많은 생산량을 할당하고, 생산량이 더 많이 부풀어지고, 그 와중에 인민들은 죽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참담하게 끝난 대약진 운동 때문에 마오쩌둥은 1962년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주석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그 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덩 샤오핑이 정권을 잡고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발생했던 문제점들을 시정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6~208p.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C%95%BD%EC%A7%84_%EC%9A%B4%EB%8F%99

http://ko.wikipedia.org/wiki/%EC%A0%9C%EC%82%AC%ED%95%B4_%EC%9A%B4%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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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국공내전

 

2차 국공내전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직후인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대륙을 일원으로 벌어졌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된 직후 국민당 치하의 중국 대륙은 대혼란에 빠졌다. 중경 때부터 문제시되어 왔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고, 전후 약탈이나 화폐 남발 등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거기에, 미국의 잉여 물자로 인해 국내 생산이 위축되면서 민생도 파탄났다.

한편, 전쟁 중에 동북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공산당은 내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1945 10월에는 국민당의 장제스와 쌍십협정(雙十協定)에 합의하면서 내전보다는 통일을 더 중요시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양측 간의 긴장은 국민당이 협상안을 엎어 버리면서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6 6월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전면화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에도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예전에 해 왔던 대로, 국민당이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예전부터 전문 분야였던 게릴라전을 생각하고 국민당에게 도시들을 내 줬다. 도시들을 내 주면서 보급선을 단순화시켜 후에 보급을 끊고 국민당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옌안까지 내 주면서 감행했던 이 전략은 1948년부터 빛을 발했다. 1949 1월에는 베이징을 수복하였고, 1949 10월에는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패퇴시켰다.

[의의 및 평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 된 사건이 바로 2차 국공내전이다. 마오쩌둥이 국민당 시대부터 주장해 온 친농민적 노선과 게릴라전 전술은 결국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만 쪽으로의 추가적 진격은 이뤄 내지 못했다. 면적에서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중국이 아닌 두 개의 중국이 세워지게 된 셈이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2~203p.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A%B3%B5_%EB%82%B4%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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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중일 전쟁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을 의미한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로 진격해 괴뢰국을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외교적으로 항전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국민당군은 대일 항쟁보다는 공산당 토벌에 집중하였으나, 공산당의 대장정을 막지는 못했고, 이후에도 공산당은 옌안에 터를 잡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한편, 이 방침에 반발한 장쉐량(張學良)이 공산당 토벌을 지시하러 내려왔던 장제스(蔣介石)를 억류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시안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공산당군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계속 내륙 쪽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국민당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전선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면 일본군이 진출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제스는 연합국의 승리를 기다렸다. 여전히 마음 속에는 공산당을 축출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일 전쟁 기간 동안 공산당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민당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지론대로 친농민적 정책을 펼쳐 가면서 그들의 세력을 키웠다. 특히, 장기전에 대비해야 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론은 후일 국공내전의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0~201p.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C%9D%BC_%EC%A0%84%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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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혁명

 

국민 혁명은 그 기원이 복잡하다. 중국의 여론이 좌파 쪽으로 기울면서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소련이 중국에 황포 군관 학교로 대표되는 여러 지원을 했으며, 1924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에 성공했다. 이를 1차 국∙공 합작이라 한다.

한편, 이 용어를 배경 지식 없이 접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혁명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주된 요체가 북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혁명이다. 그 이유는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면서 한 유언 때문이다.

현재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동지들은 마땅히 계속 노력하여 관철시켜야 한다.”

이 유언 이후로,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제국주의적이고 반봉건적인 혁명이 이루어졌고, 이 기조를 이어 1926년 장제스(蔣介石)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북벌이 시작되었다. 혁명군은 9개월 만에 남부 9성을 석권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북벌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이 주도했던 여러 대중 운동과 중산함 사건으로 인해 국민당의 입장이 선회했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27 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한편, 1928년 재개된 북벌로 베이징이 국민당에게 넘어가 북벌이 완수되었다.

[의의와 평론]

북벌로 대표되는 국민 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은 위안 정부 이후 혼란스러워진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지도층의 혁명성 상실, 상공업 계층과의 관계 악화, 그리고 농촌 정책의 부재는 이후 중국공산당이 득세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대장정 이후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중국공산당에 중국 본토를 내 주고 마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이념보다 당시 상황을 먼저 챙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188~191p.

위와 동일한 책, 196~197p.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_%ED%98%81%EB%AA%85

http://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A%B5%AD%EA%B3%B5%ED%95%A9%EC%9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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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운동

 

54 운동의 배경에는 일본과의 복잡한 조약 관계가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영국은 당시 독일의 조계지였던 산둥 반도에서 군사행동을 결행하였으며, 1915년에는 위안 정부에 21개조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후 돤치루이 정권이 들어서고, 중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상태여서 승전국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산동 쪽의 이권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열강들이 일본을 지지함에 따라 중국은 승전국으로써의 이권을 얻지는 못할망정 자기네 땅을 뺏길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이 같은 결정이 1919 4 30일에 베이징에 보도되었고,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5 4일에 대규모의 시위를 일으켰다. 이들은 21개조철폐, 산둥 반도 반환 등을 요구하였지만, 당시 돤치루이 정권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6 3일에는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이 이후 시위는 더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굴복한 정부는 결국 독일과의 강화 조약을 거부하면서 시위대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이 운동은 중화 민국 창립 이후 최초로 벌어진 전국 규모의 항일 투쟁이었고, 중국인들의 민족주의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시위 당시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후일 중국공산당의 창당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186~187p.

http://ko.wikipedia.org/wiki/5.4_%EC%9A%B4%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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