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사건 개요]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명성황후는 청에게 진압군 파병을 요청하고, 김옥균의 암살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일본은 청이 톈진 조약(1885)에 의거해 조선 파병 사실을 알리자, 기회를 노려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정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을 저지하려고 청에서 추가로 파병된 북양 함대를 황해에서 대파하게 된다.

[왜 이 사건을 다루는가]

이 사건의 결과 때문이다. 북양 함대로 대표되는 청의 신식 군대는 양무(洋務)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양무 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표어를 내세웠다. 중국의 전통적인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들여 와 중국을 근대화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 양무 운동의 주축이 태평 천국 운동의 진압에 크게 공을 세운 이홍장(李鴻章)과 증국번()이었다. 그러나, 내부적 비효율성과 국가적 지지 획득의 실패로 얼룩진 양무 운동은 결국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실패한 개혁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의 결과]

1. 북양 해군이 황해에서 대파됨으로써 양무 운동이 실패한 개혁임이 입증되었다.

2.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일본에게 타이완을 할양하도록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청의 대외적 무력함을 입증하는 꼴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주도권도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나중에 가서는 정부 주도의 개혁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나중에 신해혁명 때 최종적으로 폭발했다.

[개인적 평]

위에서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의 정치적 주도권이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고, 반정부파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결과를 설명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로 합칠 수도 있다. 바로 중화 질서 붕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이다. 아편 전쟁에서 난징 조약과 톈진 조약(1860)으로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이 그래도 좀 자주성을 회복하고 살아 보겠다고 벌인 것이 양무 운동이다. 그런데 이 양무 운동이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실패한 개혁임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양무 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계속하여 정부를 신뢰할까? 아무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싶다.

 

[참고한 문서]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178~179p.

http://ko.wikipedia.org/wiki/%EC%B2%AD%EC%9D%BC%EC%A0%84%EC%9F%81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D%99%8D%EC%9E%A5

http://ko.wikipedia.org/wiki/%EC%A6%9D%EA%B5%AD%EB%B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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