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국공내전

 

2차 국공내전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직후인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대륙을 일원으로 벌어졌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된 직후 국민당 치하의 중국 대륙은 대혼란에 빠졌다. 중경 때부터 문제시되어 왔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고, 전후 약탈이나 화폐 남발 등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거기에, 미국의 잉여 물자로 인해 국내 생산이 위축되면서 민생도 파탄났다.

한편, 전쟁 중에 동북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공산당은 내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1945 10월에는 국민당의 장제스와 쌍십협정(雙十協定)에 합의하면서 내전보다는 통일을 더 중요시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양측 간의 긴장은 국민당이 협상안을 엎어 버리면서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6 6월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전면화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에도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예전에 해 왔던 대로, 국민당이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예전부터 전문 분야였던 게릴라전을 생각하고 국민당에게 도시들을 내 줬다. 도시들을 내 주면서 보급선을 단순화시켜 후에 보급을 끊고 국민당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옌안까지 내 주면서 감행했던 이 전략은 1948년부터 빛을 발했다. 1949 1월에는 베이징을 수복하였고, 1949 10월에는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패퇴시켰다.

[의의 및 평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 된 사건이 바로 2차 국공내전이다. 마오쩌둥이 국민당 시대부터 주장해 온 친농민적 노선과 게릴라전 전술은 결국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만 쪽으로의 추가적 진격은 이뤄 내지 못했다. 면적에서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중국이 아닌 두 개의 중국이 세워지게 된 셈이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2~203p.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A%B3%B5_%EB%82%B4%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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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중일 전쟁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을 의미한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로 진격해 괴뢰국을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외교적으로 항전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국민당군은 대일 항쟁보다는 공산당 토벌에 집중하였으나, 공산당의 대장정을 막지는 못했고, 이후에도 공산당은 옌안에 터를 잡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한편, 이 방침에 반발한 장쉐량(張學良)이 공산당 토벌을 지시하러 내려왔던 장제스(蔣介石)를 억류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시안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공산당군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계속 내륙 쪽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국민당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전선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면 일본군이 진출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제스는 연합국의 승리를 기다렸다. 여전히 마음 속에는 공산당을 축출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일 전쟁 기간 동안 공산당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민당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지론대로 친농민적 정책을 펼쳐 가면서 그들의 세력을 키웠다. 특히, 장기전에 대비해야 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론은 후일 국공내전의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200~201p.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C%9D%BC_%EC%A0%84%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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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혁명

 

국민 혁명은 그 기원이 복잡하다. 중국의 여론이 좌파 쪽으로 기울면서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소련이 중국에 황포 군관 학교로 대표되는 여러 지원을 했으며, 1924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에 성공했다. 이를 1차 국∙공 합작이라 한다.

한편, 이 용어를 배경 지식 없이 접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혁명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주된 요체가 북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혁명이다. 그 이유는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면서 한 유언 때문이다.

현재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동지들은 마땅히 계속 노력하여 관철시켜야 한다.”

이 유언 이후로,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제국주의적이고 반봉건적인 혁명이 이루어졌고, 이 기조를 이어 1926년 장제스(蔣介石)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북벌이 시작되었다. 혁명군은 9개월 만에 남부 9성을 석권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북벌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이 주도했던 여러 대중 운동과 중산함 사건으로 인해 국민당의 입장이 선회했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27 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한편, 1928년 재개된 북벌로 베이징이 국민당에게 넘어가 북벌이 완수되었다.

[의의와 평론]

북벌로 대표되는 국민 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은 위안 정부 이후 혼란스러워진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지도층의 혁명성 상실, 상공업 계층과의 관계 악화, 그리고 농촌 정책의 부재는 이후 중국공산당이 득세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대장정 이후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중국공산당에 중국 본토를 내 주고 마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이념보다 당시 상황을 먼저 챙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박한제 외 4인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188~191p.

위와 동일한 책, 196~197p.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_%ED%98%81%EB%AA%85

http://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A%B5%AD%EA%B3%B5%ED%95%A9%EC%9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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